나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그림의 변수는 파괴랄까? 조각난 전통의 꼴라쥬(collage)이며 권위의식의 정형수술이다. 그 잘난 묘사력의 손재주를 믿고 아예 모두가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아는가? 잘 그린 그림보다 좋은 그림을 그리자 늘 그렇게 마음속으로 나를 채근한다. 또 문명은 발전이 있으나 문화는 발전이란 말 자체가 없다. 흔히 이것을 혼동하는 경우를 발견한다. 그렇듯 예술에도 완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다만 변화나 정리가 주어질 따름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예술은 쉽게 정의 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예술에 대한 견해의 다양성을 반증하기도 한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욕구와 발견과 희열이 창작의 필수라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는바, 욕구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파괴를 전재로 하며 그 후에 발견되는 희열이야말로 예술의 호흡이라고 믿고 있다.
창작은 작가의 고독한 영혼이 경작한 사유물임과 동시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공유물이다. 이런 맥락의 정점에 서서 나는 전심전력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화가의 치열한 운명을 있는 대로 투자하여 색을 찾고 또 집중적으로 화폭에 점하나 획 하나를 찍고 긋기를 반복한 흔적을 되뇌이며 와락 물감을 부어버리고 또 닦아내고 긁기를 수없이 연속적으로 실행할 때 얻어지는 우연발생적인 효과를 발견 하였을 때의 기쁨 하나로 붓을 놓지 못한다는 솔직한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다. 평범한 의식의 기발한 반발이나 창의적인 인식의 비약을 꾀하고 위선을 벗어나는 예술의 향연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의 자유의 정체성인 것이다. 예술가는 쉬지 않고 뼈를 가는 긴 산고와 영감의 빛을 받아 하늘을 태우는 혼불이 되어야한다.
캔버스의 사각공간과 벽이라는 네모난 공간은 서로 공생관계를 이룬다. 요즈음 그림이 잘 팔리지 않는 것도 새로운 건물의 인테리어가 맞지 않아 그럴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림 한 점 팔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세월호나 메르스 사태가 저질러 놓은 파장이 크다 아니 할 수 없다. 맹수를 잡기위해 숨을 죽이고 긴장하듯이 화가는 벽을 죽이고 그림도 죽인다는 앙리 마티스의 말처럼 사각공간에 생애가 걸린 오늘날의 현실을 직시하며 회화는 어떠한 경우라도 말로서는 유효하지 않다. 고로 예술가는 가장 훌륭한 영감의 촉진제요 불타오르는 창작의 점화제이다. 달을 얻으려할 때 그것을 등져야 하듯이 명화를 그린다는 의식자체를 버려야한다. 모든 것을 얻으려할 때 그것 자체를 버리는 일과 마음을 비우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심혈을 기울여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누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예술가가 있을까마는 섣불리 날뛰지 말고 예술의 존엄성과 겸허함으로 끊임없는 일속에 잠입하여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열심히 작업해서 얻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평소에 쌓아온 지적 고양과 뜨거운 열정에 의해 도달하는 은총과 섭리의 경지라고 사료된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한국 회화의 아이덴티티를 찾아 국제 시장으로 진출하여야한다. 진정 예술을 원한다면 아이처럼 그리자는 말처럼 예술의 궁극적인 가치는 최대한으로 단순화에 가까워지는 일 이라고 한다. 또 그림을 잘 그리겠다는 욕심은 존재의 소멸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의지로서의 세계이며 부질없는 일이다. 욕심을 떠났을 때, 즉 마음을 비웠을 때 감성의 세계는 바로 그 표상 관념으로서의 세계를 가능하게 한다. 의지로서의 세계가 강하면 표상관념은 어느덧 신기루처럼 꺼져버리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파괴는 새로운 경지의 발견이고 그것은 곧 힘”이라고 말한다. 순수한 감정의 영적 감흥을 무리 없이 환기 시킬 수 있는 회화적 방법은 무엇일까? 그리고 평소에 소망하는 나의 참모습은 어떤 것일까? 자신에게 묻고 그 실마리를 찾아 그것에다 모든 힘을 집중적으로 쏟아보자.
표현욕구의 새로운 추구는 많은 시련과 고통이 따르나 끝내는 성취감과 희열을 가져다주는 바로메터가 되기도 한다. “회화는 용광로 속에 가열된 시뻘건 쇳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자연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관심을 품고 그 감정을 가열하여 확보할 때 깊은 사고와 고뇌가 따르고 그 속에서 승화되어 나오는 제 2모작의 참다운 자기의 모습을 찾기 위하여 오늘날 내가 존재하고 그 체험의 결과를 키워 나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