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인 해석으로 표출되는 조형 공간

 

                                                                                                                                                                                                                                                         신항섭(미술평론가)

 

 

 

이미 이순을 넘긴 그이지만 그의 그림은 언제나 젊다는 느낌이다. 그런 느낌은 아마도 그에게는 무언가 남다른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남다른 것을 부단히 구체화시키려는 창조적인 열정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스스로가 신념하는 조형세계를 향해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일이야 말로 그림을 젊게 만드는 요인이다. 정체되지 않고 언제나 현상에서 한걸음 진전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색채에 대한 특별한 이해 및 감각이 있다. 그의 색채감각은 다른 이들과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밝은 색이든 어두운 색이든 또는 가벼운 색이든 무거운 색이든 일단 상투성에서 벗어나 있다. 다시 말해 최예태의 색깔임을 구분하기 어렵지 않은 독특한 색채 배합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색깔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시각적인 강렬함과 명확함과 중후함이다. 형태를 설명할 때 쓰이는 명확하다는 단어가 색채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이 색깔은 그만큼 선명하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무겁고 두꺼운 느낌이다. 하지만 그 무거움과 두터움이 그림의 분위기 자체를 무겁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안정감을 가져오는 그런 무거움이다. 바꾸어 말하면 가볍지 않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이처럼 특별한 그의 색채 감각은 그림의 전체적인 이미지 및 정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보면서 그림은 색채의 언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그렇다 개별적인 색채배열은 그 자체만으로 작가의 존재를 성립시키는데 유효하다. 그의 색채는 단적으로 말해 비현실적이다. 형태미는 구체적임에도 불구하고 색채는 현실성을 제거함으로서 몽환적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그림은 이미 현실의 재현이라는 문제를 벗어나 버렸다. 회화적인 조형공간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사실적인 조형 개념으로 부터의 제약이 없다. 형태나 색채에서 어떤 방식의 이해 및 해석이 이루어지더라도 용인된다. 다만 그 자유로운 표현의 공간에서 존재하자면 독자적인 해석으로 감상자를 납득시켜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그의 그림은 풍경화와 누드화 정물화를 망라한다. 밝은 색채와 어두운 색채 그리고 명암의 대비가 교묘히 교직되는 조형어법을 구사한다. 반면에 사실적인 형태는 뚜렷한 윤곽선으로 명확하게 처리된다. 형태 묘사에 관한한 애매모호한 표현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주의적 조형개념을 충족시키는 것도 아니다. 물론 형태미만을 놓고 보자면 사실적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적인 조형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형태만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뿐 색채배경 공간 따위는 현실과 엄격히 다른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이렇듯이 사실과 비현실이 동거하는 미묘한 관계를 설명하기란 적합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림으로서 형식이 미달이라고 할 수도 없다. 보여지는 그 자체로서는 이미 독자적인 조형성을 확보하고 있기에 그렇다. 기존을 표현 양식이나 형식이라는 고정관념의 틀 안에서 보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야말로 독자적인 조형성을 확보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특히 2003년에 제작된 누드 군상은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해석으로 누드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포즈라든지 구성 자체야 그리 새로운 맛이 없다. 하지만 여체를 붉은 색과 푸른색을 대비시킨 극적인 색채배열방식은 상식을 뛰어 넘는 파격이다. 마치 연극에서 인위적인 조명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듯 강렬한 색채대비는 시각적인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런 놀라운 시각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조형적인 새로움은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신비이자 강력한 설득력이다. 상식을 뛰어넘고도 그림으로서의 멋과 격조를 전혀 해치치 않는다.

 

여기에서 이처럼 청적의 극적인 대비가 결코 부자연스럽지 않게 보이는 것은 검은색과 녹색이 배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강렬한 색채대비를 배경을 이루고 있는 이 두 가지 색채가 거뜬히 받아내는 것이다. 검은색은 원색의 제안을 어떠한 형태로든지 무리 없이 소화시키는 친화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입증되고 있다. 그의 누드화처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누드화가 기억의 공간에서 좀처럼 찾아낼 수 없다. 창작의 묘미란 이런 것이다. 색채를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이처럼 의식을 전환케 하는 전혀 새로운 색채이미지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독특한 색채배열만으로도 개별성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