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손길로 대상을 맞아들이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의 회복
김선태(예원예술대 교수)
1.창작은 인간문화를 형성하고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며, 우리의 일상에서 찾아지는 사소한 기쁨의 축적이며 동시에 인간의 행복을 찾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수용할 줄 아는 심성과 슬기를 가꾸어 주기도 한다. 그러나 창작의 주체가 되는 작가 본인의 세계는 고통과 회환과 번민이 수반되는 고난의 길이기도 하다. 화가로서 고희 칠순이면 화업에 들어선 세월이 녹녹치 않고 이제 그림의 세계를 초탈한 진정한 맛과 멋을 음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번잡한 삶의 세계에서 진정성에 눈을 뜨고도 남을 때이다. 이번 작품전이 그만큼 화가 최예태의 작품 세계를 갈무리한다는 의미와 함께 인간의 사색과 사유는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통하여 정신적인 깊이를 성찰할 수 있게 한다는 인생에 대한 진정한 통찰을 보여준다는데 의의가 있다. 지금 시점에서 그 자신이 걸어 온 화업의 길을 반추해 본다면 만감이 교차됨과 동시에 어쩌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지는 필연의 과정들이었을 것이다.
2.최예태의 작품세계는 현실적인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으나 그 미감이 만들어 내는 회화세계는 분명히 개인적인 표현감정이 개재되고 있다.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가운데 그만의 독특한 조형적인 특징이 담겨져 있다. 리얼리티의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그림에서 밀도, 깊이. 무게, 두깨 등 표현적인 가치의 하나로써 대상 및 소재를 실재에 가깝게 재현하는 단순한 기능을 뛰어넘는 일종의 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색채와 조형언어로 그 자신의 삶에 대한 관점을 그림에 반영한다. 대체로 소재의 적정한 컴포지션과 캔버스 자체가 지니고 있는 마티에르를 최대한 활용한 붓과 나이프의 사용, 원색과 중간색이 이루어내는 오묘한 안정감 등등의 모든 것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화면에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우선 <정물>과 <꽃> 그림에서는 정겨움과 안정감이 풍기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감정을 억제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감정적이게 하는 고전적 조율 묘미가 그의 터치에 숨겨져 있다. 끈적끈적한 유화재료를 담백한 수채화 같은 느낌으로 착색하고 발색하기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다. 많은 다작에 의하여 취득되는 고도의 기량과 기법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정물화와 꽃은 새롭게 재탄생되는데, 현실 색에 근거하면서도 회화로서의 색채 이미지를 취득하고 미적 감각에 의해 배열되는 색채의 조화는 현실과 다른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또한 무채색과 유채색과의 적절한 조화와 각 소재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시각적 효과를 수반함과 동시에 정물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순수미를 구축하고 있다.
작가는 대체로 사실적인 이미지를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직된 사실주의 표현양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순간적인 인상을 시각화하는 인상주의 풍과 거리는 멀다는 것이다. 가령<붉은산>을 보더라도 형태를 명확한 색 면으로 구분한다거나 원색적인 색채배열 등을 통해 강직한 이미지를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정체되어진 화면은 금욕적인 자제력과 함축미로 군더더기가 없이 간결하여 시각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인 특징은 소재 및 대상의 형태를 분화하여 평면기법에 가까운 단순하게 재구성된 이미지로 구체적이거나 세부적인 묘사를 버리고 함축된 조형미를 구축하고 있는데, 이는 깊은 골짜기나 산들의 세부적인 표현보다는 오히려 그 심산들을 품고 있는 정기를 담고자한다. 그가 산의 구상적이고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추상적인 이미지 표현에 매료되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인체 해부학을 연구할 때 주로 뼈와 근육을 고찰하듯이 산도 골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골은 산의 기운이나 형세를 내포하는 요소로서 산 능선의 윤곽선 및 산 전체의 골격적인 부분을 형성하듯이 그의 산 그림은 생생한 에너지를 품고 있으며 산의 정기가 발산하는 기운생동이 느껴진다. 비단 산뿐만 아니라 그의 풍경 그림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일상적 자연의 색깔임과 동시에 이제 인생의 남루한 삶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인생과 자연과 또 그것을 주재하는 영적인 대상에 대한 바라봄을 깨닫게 해준다.
최근 일련의 <누드> 작품에서는 누드 고유의 피부색을 재현하기 보다는 청색과 연두색 등 다양한 색조로 변화를 추구하는 모습에서 표현주의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적인 색에 기조하면서도 회화적인 색채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물상과 물상의 경계를 구분해주고 자연스러운 색채대비의 효과를 이끌어 낸다. 이처럼 대부분 그림에서 주로 형태보다는 색채에 의미를 두는 것은 색채포름을 중요시 하는 작가적 태도로 여겨진다. 색채포름은 사실적인 형태를 해체하여 재구성하든 또는 그자신의 조형감각에 의해 임의적으로 변형 또는 왜곡되는 색채이미지가 우선하는 조형방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색채의 사용과 터치에 있어서 표현적 특징을 이루는데, 원색과 원색의 강렬한 발산, 원색과 어두운색의 적절한 조화, 대상의 강조와 생략을 통한 차분한 조화, 자유로운 터치와 절제된 나이프 사용, 추상적인 공간과 사실적인 표현과의 균형 등 이 모든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결국 그의 작품에서는 섬세함과 거칠음, 화려함, 밀도감 등이 한 화면에 적절하게 구축되면서 구상회화의 묘미와 절정을 동시에 발산해 내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되 눈에 보이는 사실을 카메라 렌즈에 투영하는 것처럼 구태의연하고 단순한 재현적 사실주의 한계를 벗어 던지고 그 자신의 인생경험을 통해 투시되는 다양한 경험과 시각을 토대로 재구성된 미의식에 의해 새로운 조형적인 결과물이다. 간결한 형태감각과 절제된 색채이미지는 이 같은 미의식의 발로이며, 그가 조형적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고 펼쳐 보일 것인가 하는 문제로 그 만의 철저한 회화사상 및 철학이 개입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자연을 바라보는 작가의 풋풋한 인정과 언제나 따뜻한 손길로 대상을 맞아들이는 인간 본연의 순수한 감정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3.최예태는 자연을 대상으로 하되 세부적인 묘사 보다는 다연의 전체적인 인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데 이는 자연 속에 들어가 자연을 일일이 분석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연에 대한 종합적인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라 자연이라는 대상을 빌어 관조와 명상의 세계로 이끌어 내는 동양적 사유가 내밀하게 담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치 한자락의 명상곡을 듣는 기분처럼 때로는 잔잔한 여울처럼 맑게 빛나다가 풍랑처럼 덮쳐오는 그 강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청정하게 빛나는 눈과 마음, 그리고 섬세함, 거칠음, 화려함과 밀도감 등이 한 화면에 어우러지면서 잘 곰삭은 토장국마냥 구상작업의 또 다른 묘미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가 그의 작품세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것은 그가 그림세계 대해 얼마나 숭고하고 가치 있는 의미를 발견하고자 삶을 불태웠는가를 알 수 있다.
화가 최예태는 그렇게 조형언어를 발전시키고 승화시켜왔으며, 그림 그리는 일은 현실적인 삶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참된 영혼을 찾고 갈무리하고 거기에서 빛나는 보석의 언어들을 채집하기 위한 것과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태양이 꽃을 물들이듯이 예술은 인생을 물들인다고 하듯이 노화가의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작품세계에서 우리는 샘물처럼 투명한 관조의 세계와 마주치게 되면서 하나의 새롭고 신선한 작가의 일생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를 음미해 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