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매혹

 

 

달빛 아래 떠오른 한 생각, 처음에 형성된 내 운명의 유전자는 무엇일까?

 모른다. 다만 지금의 나는 어디까지나 화가이고 오로지 화가로서 지상에 존재 할 뿐이다. 

그러므로 화가인 나는 그림을 그린다. 손이 아니라 가슴으로, 붓이 아니라 시선으로 그리고 또 그린다.

 되도록 심플하고 심플하게 나의 생리 저 쪽 어설픈 꼴라쥬를 넘고, 감동이라는 통념도 넘어,

매혹을 추구하는 고독한 작업 이런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나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나는 욕구와 발견과 희열이 창작의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욕구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파괴를 전제로 하며, 그 후에 발견되는 희열이야말로 예술의 에너지라고 믿는다. 

창작은 작가의 고독한 영혼이 경작한 사유물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공유물이다. 이런 맥락의 정점에서 나는 전심전력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내게 주어진 화가의 치열한 운명을 투자하여 화폭에서 집중적으로 색을 찾고 또 점 하나, 선 하나를 절대시하며 찍고 긋기를 부단히 반복한다.

 

월하삼경에 맴도는 노년의 단상 하나, 달을 보려거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얻으려면 달을 등져야 한다고 했던가. 

그때 보이는 것은 달이 아니라 달빛일 텐데, 그렇다면 달빛도 무게가 있을까? 화가는 달빛의 중량을 그릴 수 있을까? 

이렇게 난해한 화두와 그림은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리고 역사 위에 채색된 내 작업의 흔적은 무엇일까? 

고독한 매혹에 홀로 취하여 잠 못 이루는 밤, 내 그림들은 끝내 말이 없다.

 

나는 자연에 몰입하여 얻어낸 영감을 사실적인 구상세계로 바꾸고 강렬한 이미지로 산의 면모를 시적 정서로 표현한다. 

산을 좋아해서 국내의 산들은 물론 전 세계 어느 산이라도 다 그려보고 싶다. 특히 서울 어느 곳에서도 우뚝 솟아 보이는 백운대는 서울의 정기를 상징하기에 더욱 마음이 간다. 그 조형성이야말로 창조주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랴. 더욱이 암벽으로 이루어진 과묵한 백운대가 구름 속에 묻혀있을 때는 마치 유령처럼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답다. 수없이 찾아가도 갈 때마다 항상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 백운대를 나는 항상 사랑하고 최고의 모티브로 삼았다.

 

도봉산을 주제로 ‘붉은산의 환타지’를 제작하게 된 것도 창조주의

조형물과 같은 산의 매력 때문이다. 산을 오랫동안 보지 못한 날은 온몸에 작은 비늘이 돋는 것 같다. 

강을 따라 길이 흐르듯 나도 비늘을 번뜩이며 강을 거슬러 올라가 산에 닿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그림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사각 캔버스 앞에 서면, 이미 완성해 사인한 그림마저도 분할 공간으로 해체하고 변화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직선과 평행선 또는 사선을 넣는 것을 시도하면서 변화를 꾀한다. 

선 하나만 들어가면 단조로우니 두 세 개의 선으로 공간 분할을 시도해본다. 

그것은 곧 창틀 이미지로 발전해간다. 안정된 공간, 실내에서 창틀을 통해 보이는 자연, 그것도 희미한 자연이 아닌 드라마틱한 자연으로 구성해간다.

많은 관람객이 왜 그림에 선이 들어가 있느냐고 묻는다. 

조금은 따분하지만 실내에서 창틀을 통해 내다보는 자연을 상징한 그림이라고 대답하며 공간을 분할하고 변화를 시도 한다고 답한다. 

바로 창틀 이미지를 심상화한 그림이랄까? 

캔버스라는 사각 공간은 작가마다 각개의 개성을 표현하는 이미지 실현의 공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화가는 그야말로 준험한 산령을 넘는 가시밭길 같은 길을 간다. 

온갖 번뇌를 극복하면서 끊임없는 정진과 투쟁으로 일궈내는 희열감이 없다면 도전할 기력을 찾지 못할 것이다. 

예술과 작가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소중한 극약 처방은 희열감을 맛볼 때의 감동이며 그것을 머금고 사는 예술가는

정년퇴임이 없다. 누가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붓을 들은 채 내 생애를 다하는 일”이라고 말하곤 한다. 

삶의 지혜란 일손을 덜고 마음을 맑게 하여 고요 속에 사는 것 이라 했거늘, 그 교훈을 실천하지 못하고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누적된 작업량을 볼 때마다 

“화가는 톱니바퀴와 같은 강인한 의지를 가져야한다’’ 는 밀레의 말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