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태 화백의 프리즘과 자연의 재창조

 

                                                                                                                                                                                                                      감윤조 (예술의전당 미술관 큐레이터)

 

한국 미술계에 있어서 구상회화는 논의의 범위가 비교적 좁은 편이다. 더욱이 그 구상작품의 내용이 전통적인 누드나 자연풍광을 다루는 것이라면 그 논의의 기대 가능성은 더 낮아질 수 있다. 그러한 구상회화는 독보적 취향을 불러이르키거나 향수를 환기 시킨다는 선입견도 가질만하다. 이와 같이 한국적 구상미술은 우리가 미처 정밀하게 들여다보기도 전에 이야기가 단순화되어 버리는 느낌을 준다. 이런 관점이라면 최예태 작업 범주 역시 그러한 구상의 조형형식으로 간단히 분류할 수 있다. 만약 미술에 진화론적인 견해가 있다면 최 화백은 현대미술의 출발점에서부터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화업 50년, 그 질곡의 시대를 가로지는 동안 시대정신이나 아방가르드의 깃발을 화백의 작업실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최화백은 회화의 기본적인 재작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재료적 기발함과 물량의 미학이 주도 하는 오늘날의 미술경향을 대비 시켜본다면 소극적인 작업 방식일 수 있다.

최화백은 캔버스에 오일이라는 기본적 틀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작품내용 또한 누드와 자연이라는 수백 년 걸친 전통적 소재를 다루고 있다. 최화백의 작업에서 보여 지듯이 구상회화의 장점이자 한계는 다름 아닌 뛰어나 가독성이다. 그 접근의 용이성은 작품을 너무나 쉽게 해독하게 하는 성급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표상 그 너머에 있는 본질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 평가와 판단은 잠시 유보 되어야 한다. 시각적 명료함이 갖는 문제와 작품의 독해는 별개로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최화백의 누드와 자연은 동상적인 관점이나 기준으로 바라볼 때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풍경은 미메시스 mimesis로써의 자연도 보여주지 않으며, 감상자의 시각에 익숙한 세계와도 동떨어져 있다. 다분히 왜곡되고 연출된 최화백의 자연은 상당히 주관적이며 육감적인 개념으로 접근된다. 작업 전반에 펼쳐지는 임파스토 impasto와 강렬한 색채는 최화백의 프리즘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여는 장치가 된다. 자연의 외관이 전달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세계, 재해석을 통한 그 본질에 정작 관심이 가 있는 것이다.

 

 

한국적 정물화의 구축

최화백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지난 70년대를 중심으로 다루어진 일련의 정물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지금도 정물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으나, 당시 정물이 가지는 의미는 최화백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큰 것이었다. 또한 정물은 최화백에게 국전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국전 연4회 특선을 수상한 일련의 작품들, 그 작품들은 한국적 정물화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976년 출품작<향수의상징>에서 해바라기, 복숭아, 포도.도자기류를, 1977년 <가보>는 우리 옛 무인의 의상, 칼, 투구.영정, 1978년의 <상고>에서는 기물, 과일, 소반, 천 등의 소담한 정물을, 1979년 <수 longgevity>에서는 꿩, 전통그릇, 해바라기, 도자기류 등를 보여준 바 있다.

이러한 일련의 정물에서 보여 지듯이 대부분의 소재들이 일상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울러 우리의 역사와 전통으로부터 유래한 사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일상성을 벗어나지 않는 그 대상을 근거로 하여 최화백은 수많은 연습과 반복을 되풀이하였다. 세잔의 사과와 정확히 일치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 결과 1970년대는 이른바 ‘최예태 식 정물’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매우 인상적인 형식을 만들어 내었다. 이후 대략 1990년대 이전까지 보여준 구상작업도 우리의 생활도자나 자연대상물을 다룬 시기라 하겠다. 민족 정서가 그대로 녹아있는 최화백의 정물은 샤르댕과도 비교될 수 있다. 화백의 샤르댕에 대한 경모는 자신의 작업에 적잖은 영행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서민 가정의 일상생활 용품에 대한 깊은 관심 역시 양자가 교통하는 정신성을 가진다. 밀도 있는 유화의 채색 방식 또한 최화백의 정물에 독특하고 깊은 정취를 안겨다 주었다. 샤르댕이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휩쓸려 다니지 않고 일상적이 평범함을 유지한 점에서도 그 정신적 맥을 같이한다.

샤르댕의 말처럼 ‘정물은 움직이지 않는 생명’이었고, 최화백 역시 개별적인 생명의 집합체로 접근하고자 하였다. 화백의 삶 속, 그 생활 반경 속에 늘 자리매김 하는 정물은 분명 하나의 생명체였다. 동시에 최화백의 정신세계와 분리될 수 없는 분신과도 같은 공감의 대상이었다. 공격적인 모더니스트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가치하며 사소한 사물로 돌려세울 수 있는 그러한 대상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화백은 진부할 수 있는 그 사물들에게 생명과 존재감을 쥐어주고자 했다. 나아가 한 점의 정물에 대하는 화백의 자세는 마치 수도사적인 입장과도 같다. 세상의 허세와 과장과는 늘 반대편에 위치하는 화백의 자세 속에서 서민적 휴머니즘도 발견할 수 있다. 최화백의 단순한 삶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로 말미암아 향후 펼쳐지는 일련의 작업들을 더욱 밀도 있고 풍부한 내용으로 펼쳐지게 된다. 굳이 정물이 아니어도 좋았으리라. 최화백이 그 어느 대상을 선택했다 해도 같은 결과를 가졌음을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자연의 질서-산과 누드에 대하여

정물이 이어 자연과 누드만큼 화가들에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용어가 드물 것이다. 화가는 자연 속에서 태어났고 거기에서 성장하며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갈 운명에 처한다. 그 친근한 품속에서 모방의 방식을 통해 자연을 재현해내고 싶은 것은 화가들의 본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누드 역시 화가의 길을 걷는 데 거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라 하겠다. 일종의 작은 자연이라고 할까. 그 형태와 색채의 다양함, 그리고 표현의 무궁무진함에서 자연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에 대한 경외감이 깃들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 Timaios에서 우주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철학자는 ‘신은 그렇지 못한 상태에 있던 것들을 가능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하게 구성해내었다’고 말한다. 그 속에는 조화 harmonia가 주는 아름다운 비례관계, 균형(혹은비례)symmetria이 가지는 우주의 구성과 구조를 이야기한다. 이른바 질서를 근거로 이 우즈는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좋은(훌륭한) 것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불균형하지 않는 것‘이라는 관점이 한 철학자의 혜한이라면 이를 화가의 눈으로 접근한 예가 바로 최예태 화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자연과 누드는 하나의 균형과 비례, 질서의 원칙을 준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연이 선사한 놀라운 축복인 빛과 색채, 그 오묘한 조화에 대한 경건함, 혹은 놀라움은 그의 캔버스 결 속에 독특한 질서로 조합된다.

최화백 역시 창조주가 만든 가장 아름다운 자연과 인간을 우주적 질서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화백은 ‘자연과 누드는 서로 닮아 있으며, 고유의 생동감과 긴장감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종의 정령을 공통적으로 발견 한다’고 말한다. 더욱이 ‘산은 조물주가 만든 가장 훌륭한 조형물이며 흥미로운 것은 인체에서도 그러한 산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아름답고 유기적인 선, 높고 낮은 혹은 깊고 얕은 인체의 구조는 양자에서 공히 발견되는 그러한 요소이며 나아가 인체는 광대한 자연의 축소된 형태’로 화백은 해석한다.

최화백이 자연에 대한 관조적 눈을 뜨기 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시행착오를 필요로 하였다. 우연한 기회에 대자연과 마주한 화백은 자연이 보여주는 그 놀라운 파노라마 앞에 무한한 감동을 얻었다. 산이 가지는 형태나 능선의 조형적인 아름다움, 놀랍도록 미묘한 색감의 변화, 하늘과 대지를 가로지르는 웅장하고 도도한 기세는 화백을 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모든 자연에 대한 감사는 늘 준비된 이의 몫이다. 자연은 그 본질을 이해하려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최화백은 그 자연에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서고자 했고, 자연 역시 화백에게 그 신비로운 세계를 열어 보여주었다.

최화백은 산을 중심으로 자연의 대서사시를 풀어내는 작업과 동시에 같은 시선으로 누드를 다룬다. 화백의 누드는 통상적인 피부색을 벗어나, 마치 자연 속에서 빛을 받거나 계절 별로 뿜어내는 색채와 동일하게 채색되어진다. 화백을 말대로 ‘누드는 가장 신비롭고 깊이 있는 조형적 집합이다. 모든 색의 근원은 자연이며, 그 자연을 가장 잘 투영할 수 있는 소재도 누드만한 게 없다. 누드는 살아있는 자연’인 것이다. 최화백의 누드는 다분히 구축 적이다. 마치 장대한 자연풍경을 다루듯, 거대한 산의 능선으로 나이프가 지나간다. 누드를 다루는 화백의 붓에는 자연이 연출한 빛과 그늘이 동일하게 담긴다. 최화백은 전통적인 누드에서 완연히 벗어나 있다. 그의 누드에서는 피그말리온이 보여준 열망의 감정을 발견하기 어려우며 그리스 미술의 카논이 주는 아름다움도 없다.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을 이어온 인체의 미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자연의 피조물로서의 가장 완전한 형태의 누드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 화백에게 있어서 더 절실했다. 최화백은 누드를 대함에 있어서 하나의 구조물을 건축하려 한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구조물을 생성시킴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유지 시키려고 하듯이 말이다. 부드러운 피부의 질감과 그 조직이 갖는 섬세함은 포기한다. 이러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그의 누드는 태양이 산을 넘어가면서 토해내는 검붉음과 숲의 짙푸름이 도시에 스며든다. ‘자연의지가 반영된 자연의 색감을 바탕으로 인체의 생명감을 불어 넣고자한다’ 는 화백의 관점은 그의 누드를 잘 설명해준다.

 

새로운 자연의 창조

화백의 작업은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유지하되 다분히 개별적인 사유의 장으로 몰입 하고자 한다. 강렬한 색채의 사용을 통한 고유색의 부정도 그와 같은 방식의 하나이다. 자연의 충실한 재현 방식을 따르는 것은 화백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 자연은 외경과 존경의 대상임과 동시에 반드시 재해석 되어야 할 대상이다. 자연의 질서에 무한한 감사를 표현하되, 그 감흥은 반드시 자신의 방식으로 이입되어야 한다. 그러기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신의 몸을 던져야 하며 그 투사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 곧 비현실적인 색채를 통한 새로운 자연의 창조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역으로 그 자연을 다시 받아들이며 그 위대함을 수면으로 부상 시킨다. 자연의 소중함이나 생명성에 대란 논의가 축소된 이 시대에 화백의 관심은 그 자연을 다시 환기시키는 일이다. 최 화백의 산에 대한 또 하나의 관심은 촉각적 구성공간을 구축하려는 점이다. 그의 작업 전반에 흐르는 안료의 처리방식과 채색 법은 독특한 마티에르로 점철 된다. 자연이든 인체이든 어느 하나 가볍게 다루어지는 법이 없으며 하나하나 기초부터 시작하여 쌓아 올려 진다. 화백의 안료와 배색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런 음률은 바로 그러한 결과물이다. 그 조형적 효과는 분명 의도된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배어나온 회화적인 색감을 간단하게 언어로 정리하기란 어렵다. 화백의 오랜 시간에 걸친 개별적 경험과 숙련의 결과 이상으로 달리 그 맛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최근 화백의 작업에서 두드러지는 부분은 화면의 분할과 공간처리 방식이다. 마치 몬드리안의 추상 작업처럼 화면의 일부를 경계 짓는 화백의 공간은 관조자로 하여금 여러 가지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다. 화백은 그 분할의 공간을 하나의 창으로 해석하여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는 틀로서 바라본다. 그 경계는 자연과 인간의 대비를 보여줌과 동시에 바깥과 안을 한 화면 속에 일치시킨다. 전형적인 구성적 풍경에 개입된 그 선은 추상적 단계로 넘나들게 하는 틀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최근 들어 최 화백은 전통을 바탕으로 한 형식적 변화를 새롭게 모색하고 있다.

 


최예태 화백이 화업 50주년을 맞이하였다. 미술사학자 우도 쿨더만은 ‘예술적 천재에 의해서만 과거가 새롭게 보인다’ 고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 한국미술에서 과연 그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고 분석하고 있는가. 또한 과거를 새롭게 보기 원하는 천재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해 본다. 과거의 것, 옛 방식이라고 간단히 분류하려는 우리의 태도 속에 숨겨진 오류를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최화백은 장인적 기질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수양과 연습을 보여주었다. 그 타고난 근면한 기질과 성향은 자연에 대한 감사의 언사로 연결되었고 전통은 더 새로운 자연관으로 부활한다. 한 화가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좁은 각도의 조명과 겐즈가 필요하다, 동시에 정밀한 분석의 메스가 준비되어야 한다. 화업 50년을 계기로 그간 화백이 다루었던, 지금도 여전히 다루고 있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일이다.